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구모 주이치 (문단 편집) === 탄탄대로를 달리다 === [[일본해군병학교]] 36기 출신으로 1908년에 졸업했다. 졸업성적은 총원 191명 중 8등. 최상위권이었기 때문에 해군병학교 성적으로 이후 승진이 결정되는 일본해군의 전통상 탄탄대로를 달린다. 이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성적으로 승진이 결정되는 육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육해군이 극한 대립을 벌인 이외에 육군 내부, 해군 내부에서 또한 파벌 싸움이 극심해서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진급을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육군은 황도파와 통제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했고, 해군은 함대파와 조약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했다. 이는 일본군의 근본적인 모순이자 문제가 된다. 사관학교(병학교) 성적이 좋으면 실전에서 아무리 무능한 인물이라도 무조건 승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즉 실무에 적응을 못하더라도 이론적으로 완벽하면 실력과는 상관없이 승진할 수 있다는 말과 똑같다. 나구모는 이후 여러 함상근무를 거쳐 일본해군 최초의 항모기동부대인 제1항공함대 사령관까지 오른다. 신중한 성격을 지닌 군인으로, 용의주도한 계획을 바탕으로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진주만 공습]]을 실행 하여 [[미 해군]]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처음에는 항모를 사용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반대했다가 야마모토 제독에게 "그렇다면 그만두시오!"라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서 작전을 실행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후 6개월간이 그의 전성기였다. 동으로는 하와이까지 진출한 그의 기동함대는 서로는 이듬해 인도양까지 진출하여 실론 섬의 영국군 기지를 폭격하고 영국 동양함대를 박살냈다. 나구모가 지휘하는 항공함대의 진주만-인도양 전과는 항공모함 1척 (영국), 전함 5척, 구축함 7척을 격침하는 대단한 성과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